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틴 보어만 (문단 편집) === 초기 이력 === 1900년 6월 17일 [[독일 제국]] [[프로이센]]에서 집배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교에서 퇴학 당하고 농장에서 일을 하다가 [[제1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18년 18세로 [[독일 제국군]] [[육군]]에 지원, [[포병]][[연대(군대)|연대]]에서 [[장교]] [[당번병]]으로 근무했다. 실전을 겪어본 일 없이 전역 후 [[부동산]] 관리인이 되었고, 전역군인으로 이루어진 우익 민병대 [[자유군단]](Freikorps)에 가입했다. 이후 [[1924년]] [[루돌프 회스]][* 후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소장이 되는 인물이다. 부총통 [[루돌프 헤스]]와는 다른 인물.]와 함께 자유군단에 있던 "배신자"를 처단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선고 받고 감옥에 갔다. 이후 1927년 정식으로 나치당에 가입했고, [[나치당]] 간부인 [[발터 부흐]]의 딸 게르다 부흐와 결혼해서 히틀러를 만났다. [[발터 부흐]]는 전과자 출신인 마르틴 보어만을 탐탁지 않게 생각해서 딸의 결혼을 반대했다고 한다. 히틀러는 1929년 보어만의 결혼증인을 서 주었고, 이후 보어만은 히틀러의 개인적인 가신 노릇을 하게 되었다. 1933년 3월 히틀러가 수상이 되고 나치당이 일당독재체제를 수립하자, 히틀러의 가신인 보어만도 갑자기 툭 튀어나온 권력자가 되었다. 그 결과 1933년 10월에는 나치당 제국위원(Reichsleiter) 18인 중의 1인이 되었다. 같은 해 11월에는 제국의회(Reichstag) 의원이 되기도 했다. 1933년부터 1941년까지 부총통 [[루돌프 헤스]]의 개인 비서로 일함과 동시에 히틀러 개인 재산의 관리업무를 맡으면서 점차 실권을 틀어쥐었다. 무능한 헤스는 음모론에 빠져서 요상한 짓이나 하던 별볼일 없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총통부 내에서 히틀러의 신임은 진작부터 보어만으로 넘어갔다.[* 이는 헤스의 굉장히 독특한 성향에 기인한 바도 크다. 일례로 헤스는 히틀러와 측근들의 점심식사 때에 자신만의 음식을 들고오다가 히틀러에게 들킨 적도 있었다. 히틀러는 총통관저의 음식을 같이 들기를 권했는데 헤스가 우주의 기운이 담겼다는 이유로 자신이 가져온 음식을 따로 먹기를 고집하자 그럴 거면 오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를 하기까지 했다. 이처럼 히틀러는 헤스에 대해서 탐탁지 않아 했기 때문에, 보어만을 통해서 헤스의 일에 간섭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히틀러의 신임은 진작부터 보어만으로 넘어가 있었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보어만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jpg|width=100%]]}}} || ||<#ddd,#191919>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보어만 || 보어만은 1940년 친위대에서 최종적으로 상급집단지도자로 승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